중국에는 옛날부터 개고기를 먹는 관습이 있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는 개뼈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은 중원, 즉 황허 강의 중류 유역뿐만 아니라 황허 강 상류에서 양쯔 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기까지 널리 나타나는 현상이다. 게다가 어느 지역에서나 개를 가축으로 길렀다.
황허 강의 중류 유역에서 대략 기원전 4500년부터 2500년까지 약2,000년간 계속된 양사오(仰韶文化)의 유적에서는 멧돼지, 개, 돼지, 양, 소 등의 뼈가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 가축으로 인정되는 것은 돼지와 개뿐이다.(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1990)
중국 전국에서 개는 신석기 시대부터 가축으로 널리 사육되었다. 물론 개가 가축이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식용으로 쓰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가축 뼈의 빈도를 종목별로 비교하면, 개가 고기로 만이 소비되는 상위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 시대 이후에는 역사와 연중행사를 기록하게 되었으므로, 다양한 문헌에서 개고기를 먹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기』의 「월령」은 음양오행설에 의거해 황제의 복식과 음식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 7월 항목에는 “…개고기와 함께 삼씨(麻實)를 시식한다.”고 나와 있다. 개고기가 군주의 의례식으로 제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설문』(說問)에는 ‘헌’(獻)이란 글자는 ‘개를 종묘에 바치다’라는 뜻이었고, 그래서 ‘개’(犬)라는 글자를 곁에 붙여서 썼다고 되어 있다.
『국어』「초어상」(楚語上)에서 “선비는 돼지고기와 개고기를 올릴 수 있고, 일반 백성은 생선구이를 올릴 수 있고, …진기한 것은 올려놓지 못하며 사치스럽게 많은 공물을 올리지 않는다.”는 대목이 한 예다. 여기서 개고기는 돼지고기와 마찬가지로 진기한 것의 부류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제사에 차려낸 음식은 제사가 끝난 후 제사 지낸 사람이 먹는다. 개고기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개고기는 대표적인 육류고 일상적으로 자주 먹는 음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사 때도 공양물로 올렸을 것이다.
『주례』「천관」(天官)에 ‘바진’(八珍)이라는 명물 요리가 나온다. 진귀한 음식재료로 만든 여덟 가지 고급요리인데, 그 가운데 ‘개의 간’으로 하는 요리가 그 중의 하나로 소개됐다.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개는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중요한 영양원이었다. 『맹자』에 “닭과 돼지와 개 같은 가축을 기르는 것을 그때를 놓치지 않으면 일흔 살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개고기의 서열이 꽤 상위였음을 알 수 있다.
개고기를 맛있고 질 좋은 음식물로 생각했던 증거로 『국어』「越語」(월어)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장부가 태어나면 술 두 단지에 개 한 마리, 여아를 낳으면 술 두 단지에 돼지 한 마리를 준다.”는 대목이 있다. 개고기는 술, 돼지고기 등과 마찬가지로 고급 식품이었던 것이다. 또 당시 딸보다도 아들을 선호했던 것으로미루어 보아, 월나라가 있었던 양쯔 강 유역에서는 개를 돼지보다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개가 중요한 음식재료이며 제사의 필수품이었으므로, 궁정에는 제사 지낼 때 쓸 개를 기르는 전문직도 있었다. 『주례』「추관」(秋天)에 따르면, 그 관직은 ‘견인’(犬人)이었다.
전국시대에는 개 잡는 일을 하는 ‘구도’(狗屠)라는 직업이 있었다. 개백정이라는 전문직이 생길 만큼 개고기를 자주 먹었다는 애기가 된다.
『사기』「자객열전」(刺客列傳)에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암살을 시도됐던 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형가(荊軻)의 얘기가 나온다. “…형가는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개백정, 고점리와 어울려 연(燕)의 길거리에서 술을 마셨다.”
전국 시대에는 개백정이 직업으로 자리 잡을 만큼 일상적으로 개고기를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책』「한책」(韓策)에 자객 섭정(聶政)에 대한 기록이 있다. 어떤 사람이 섭정에게 큰 돈을 주며 정적(政敵)의 암살을 의뢰했다. 그러나 섭정은 “…집안이 가난해서 타지를 떠돌며 개백정(狗屠) 같은 천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럭저럭 아침저녁으로 어머니 입맛에 맞는 고기를 사서 어머니를 모실 수 있습니다.”라며 완고하게 거절했다. 개백정은 비천한 직업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살 만큼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진나라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뒤로도 개고기를 먹는 풍습은 쇠퇴하지 않았다.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 밑에 용맹한 장수로 번쾌(樊噲)가 있었다. 항우(項羽)가 암살을 계획한 홍문(鴻門)의 회(會)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한 바로 그 번쾌의 전직은 바로 ‘개백정’이었다.
한나라 때도 개를 관리하는 관직이 있었는데, 관직명은 ‘구중’(狗中) 또는 ‘구감’(狗監)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