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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전모를 파악하고자 길을 나선 400여일 간의 기록이다.
후지와라 신야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시리아, 이란, 파키스탄, 인도, 티베트, 미얀마, 태국, 중국, 홍콩, 한국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사람 사는 세상의 거짓 없는 모습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육체적, 정신적 훈련의 결과물이다.
동양을 택한 이유는 애초에 방랑을 시작한 곳도, 에세이스트가 된 곳도, 사진작가가 된 곳도 모두 동양이기 때문이다. 후지와라 신야는 이런 동양을 “혈액이 요동치는, 선악과 미추가 뒤섞인 세계”라고 일컫는다.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보통사람들의 생활 의식 속으로 들어간 저자가 목도한 것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흔적을 새겨나가는 삶의 한복판, 다름 아닌 ‘일상’이었다.
식당의 낯선 손님에게 접근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운 후 사례금을 받는 거식녀, 지중해에 수장된 트랜스젠더 하산 타스데미르, 한밤에 처절하게 불경을 외우기 시작하더니 새벽이 돼 속세로 떠난 마흔 네 살의 파계승, 목을 매는 게 특기인 치앙마이의 실성한 매춘녀, 돼지 방광을 부낭처럼 매달고 바다를 헤엄쳐 홍콩으로 밀입국한 셰이 형제···. 창녀부터 승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의 남루한 일상이 자리한 공간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온기 이상의 ‘살아 있다’는 뜨거운 열망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관통해 흐르는 ‘피’의 역사였다.
그렇게 방랑 10년 만에 찾아온 빙점에서 출발한 여행은 동양 곳곳의 기저 깊숙이 침투하는 발걸음이 더해질수록 인간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으로 뒤바뀐다.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가득 찬 육체를 가진 존재들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더 절실하게 자각하도록 이끌었고 그것을 순시에 간파하는 찰나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빙점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책은 그가 장년기에 지나쳐온 객지의 기록임에도 여전히 분방하고 거침 없는 청춘을 닮았다.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언어와 사유를 통해 현지의 삶을 그려낸다.
후지와라 신야/ 이윤정 옮김/ 작가정신/ 528쪽/ 2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