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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월 지구를 떠난 아폴로 8호가 달 주위를 돌아 다시 지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우주비행사들은 창밖으로 지구가 떠오르는 장면에 매료됐다.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우주 소식에 귀 기울이고 있던 인류에게 '지구돋이'의 장관을 본 소감을 들려주기 위해 우주인들은 미리 준비한 글을 읽어 내려갔다. 구약의 창세기였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신앙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아폴로 8호 우주인들은 불가해한 우주의 신비를 표현할 수단이 필요했고, 성서는 인류가 그 바탕 위에서 수많은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창조하고 문화를 피워낸 강력한 소스 코드, 즉 근본 텍스트 중 하나였다.
하버드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 푸크너는 지금의 세상을 만드는 데 이야기와 글이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지 설명하기 위해 인류가 쓰고 읽은 텍스트 16개를 선정한 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오가며 글이 세상을 바꾼 마법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방 원정으로 이끈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였다. 왕은 트로이를 함락시킨 영웅 아킬레우스를 동경했고, 스스로 아킬레우스가 되고 싶었다. 그는 모든 원정길에 '일리아스'를 지니고 다녔다. 그 후 제국 전역에서 사람들은 호메로스 서사시를 읽으며 그리스어를 배우고 알파벳을 익혔다. 호메로스 서사시는 헬레니즘 문명을 잉태하고 키운 근본 텍스트였던 것이다.
지난 세기 세계를 만든 가장 강력한 글은 공산당 선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카스트로는 1952년 이 글을 접한 뒤 "결코 잊지 못할 말을 읽었다"고 고백했다. 공산당 선언이 근본 텍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현상의 기원을 들려주고, 인류의 스승들을 흉내 내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처럼 아주 신성한 정치적 지향성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분 석했다.
저자는 '논어', '금강경', '겐지 이야기', '돈키호테', '마르틴 루터의 95개 반박문' 등이 잉태된 현장을 찾아가고 이 문서들이 타 문명을 자극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이야기도 들려준다. 인류의 지성사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전하는 저자의 솜씨에 매혹되며 읽게 된다.
마틴 푸크너 저/ 최파일 역/ 까치/ 472쪽/ 2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