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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의 기원이 된 고려는 한국사에서 국제화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시기였다. 당대 수도 개경 인근의 예성강 하구에 있는 벽란도는 국제적인 교역항이었다. 송, 거란, 여진, 일본은 물론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몰려들었다. 고려사회에서 이슬람 상인 회회아비가 등장하는 ‘쌍화점’이란 노래까지 등장할 정도로 교역이 활발했다.
그렇다면 개성상인을 낳은 고려인들은 어떤 교역과 상품을 취급했는가. 개성상인들이 왕래했던 남중국 항구는 구체적으로 어디였는가. 중국 남송 시기인 1228년 저장성 경원(慶元·오늘날 닝보)에서 편찬한 지방지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에는 고려가 중국에 판매한 상품 목록이 있다. 값비싼 품목을 뜻하는 ‘세색’에는 은, 인삼, 사향, 밀랍이 있다. 값이 비교적 저렴한 ‘추색’에는 명주, 밤, 대추, 강황, 호피, 구리그릇, 돗자리와 함께 푸른 청자기가 포함됐다. 13세기에 고려는 이미 고급 상감청자를 생산했다. 청자는 세색이 아닌 추색으로 분류됐다. 고급 상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려청자가 송에 대량으로 판매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송은 귀족도 질그릇으로 식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고려에서 대량으로 자기를 수입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한·중·일 관계도 21세기 못지않게 복잡 미묘했다. 한 나라의 부침과 성쇠가 이웃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일국사’에 초점을 맞추면 동북아 역사 흐름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저자인 단국대 김영제 교수는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을 축으로 해서 동아시아 연구에 몰두하면서 일국사와 지역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도 국가 안보 위협을 이유로 수출을 금한 품목이 있었다. 고려 고종 18년(1231)에 무신 권력자인 최우는 ‘송상’에게 무소뿔(水牛角)을 사오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되돌아온 송상은 그것이 송나라의 수출 금지품이어서 구해오지 못했다고 했다. 송상은 “무소뿔로 활을 만든다고 해 칙명으로 매매를 금한다고 하여 사오지 못했다”고 답했다. 고려산 밤이나 대추도 수출품목이었으며 솔방울, 은행, 족두리풀도 양국 간 교역대상이었다.
저자는 “고려는 남중국 시장에서 수요가 많고, 중국에 비해 가격 측면으로도 우위에 있던 일상품을 판매했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중국에서 값비싼 고려 돗자리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가짜 상품, 이른바 짝퉁이 성행했다. 고려시대에 나온 중국어 교재인 ‘노걸대(老乞大)’를 보면 갓끈, 바늘, 족집게, 장기, 바둑, 송곳, 비단, 서적 등이 고려로 들어왔다.
책에는 당시에도 수출품이 적게 들어오거나 많이 들어오면 국가경제에 영향을 미쳤던 사실이 나온다. 고려시대는 물론 중국, 일본에서도 대외교역이 매우 중요했다.
김영제 저/ 푸른역사/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