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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학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한 번쯤은 탐구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인 주제가 아닐 수 없다. 60년간 인간발달에 대해 연구해 온 세계적 심리학자인 제롬 케이건이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란 제목으로 책을 펴낸 것도 인간의 속성을 좀 더 깊이 보여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저자는 “은퇴한 한 심리학자의 여러 생각을 담은 글”이라며 “여유로운 저녁 시간에 읽는 것이 제일 좋겠다. 와인 한 잔 곁에 두고 읽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했다. 물론 겸손의 말일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심리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철학·사회학 등 거의 온갖 분야를 망라한 저자의 박학다식에 손을 들지도 모르겠다. 책은 비교적 쉽게 쓰였지만 기초지식이 없이는 ‘항해’에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언어·지식·배경·유전자·뇌·가족 등 12개 주제별로 인간의 모습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생물학적·심리학적 실험과 전문서적뿐 아니라 영화나 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서 광범위한 예화를 뽑아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폭넓게 기술했다.
케이건은 ‘스키마(schema)’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한다. 스키마는 사건의 물리적 특성의 표상으로 인간이 머릿속에 어떤 사건을 재창조하려 할 때 만들어지는 이미지의 토대를 일컫는다. 예를 들면, 조금 전 만난 사람의 스키마에는 눈, 코, 입의 공간적 배열과 피부·머리카락 색깔 등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단어 중에 스키마가 표상하는 실재를 기술하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스키마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를 많이 구사하는 정치인은 더욱 카리스마가 있고 더욱 많은 영감을 불어넣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요즘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단어보다 스키마가 더 확실하게 보존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의 뇌는 언어의 도움 없이도 사건이나 장소의 물리적 특성을 잘 기억하던 종의 뇌에서 진화해왔기 때문이란다. 매끄러운 말의 세상과 거친 사건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심오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을 기호화한 ‘언어’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진실이 되는 ‘지식’은 인간이 뛰어넘어야 할 영원한 과제다.
‘배경’도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다. 특히 문화적 배경이 그렇다. 일본인은 공공의 배경인 다테마에(겉으로 드러나는 마음)와 사적인 배경인 혼네(사람의 본심)를 구분해 표현한다. 상황에 따라 인간관계의 양식을 달리하는 대표적 사례다. 스위스 엘리트 사회계층 출신인 칼 융은 오스트리아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의 희생자라 생각해 온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의견의 불일치 때문에 결별하고 말았다.
‘뇌’는 아직도 우리가 작동 원리를 잘 모르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과학자들은 모든 행동, 생각, 느낌이 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되고, 다시 뇌의 상태는 그 사람의 유전자, 과거의 역사, 현재 상황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혈류패턴만으로는 한 사람의 도덕적 신념이나 관련된 감정을 예민하게 측정하지는 못한다. 뇌를 완전하게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신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말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가족’은 인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자신의 친척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의 재능과 명성을 자신의 자아 네트워크에 추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도 위대해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암시를 받게 됐다.
어린 시절 형성된 특성이 평생을 좌우할 거라는 ‘유아 결정론’은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 없다. 수줍음 많고 소심한 만 2세 아동 중 4년 후에도 그런 성격을 보이는 아동은 15~20% 정도에 불과했다.
도덕 의식 또한 인간의 특징이긴 하지만 배경이나 주체, 역사적 환경에 따라 상대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밖에도 인간의 특질에 대한 케이건의 다양한 탐구는 독서의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인간학 백과사전’이라고나 할까. 이 책은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독자들이 내용을 읽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풍부하게 제공할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나의 좌표를 찾아보자.
제롬 케이건 저/ 김성훈 역/ 책세상/ 2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