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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judgment)을 내려야 할 때 여러 사람이 함께 결론을 도출하면 개인의 판단보다 더 정확할까? 많은 이들이 이른바 ‘집단 지성’이 더 정확할 거라 생각하지만, 대니얼 카너먼 프린스턴대학 심리학 교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카너먼은 인간의 비합리성과 그에 따른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행동경제학’ 창시자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의외로 군중은 그렇게 지혜롭지 않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므로 판단 과정에서 기분, 날씨, 주변 사람 등 여러 상황의 영향을 받는다. 카너먼은 판단을 흐리는 이러한 요소들을 ‘잡음(noise)’이라 명명한다. 여러 사람이 모일수록 잡음이 낄 가능성이 증가한다.
대표적인 예가 ‘부화뇌동(附和雷同)’이다. 래브 무치니크 히브리대학 교수 연구진이 댓글 추천 수에 따라 게시글 순위가 결정되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진이 추천 수가 0이던 댓글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처음으로 추천 버튼을 누르자 다음 사람이 그 댓글에 추천을 누를 가능성이 35% 증가했다. 5개월 뒤엔 이 댓글이 달린 게시글 순위가 평균 25% 상승했다. 카너먼은 “첫 번째 추천이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판단에 영향을 끼치는 ‘잡음’으로 작용한 것”이라 설명한다. “어떤 그룹에서 한 명이 즉시 찬성을 나타내면, 나머지는 그처럼 찬성할 이유를 갖게 된다. 집단이 어떤 제품, 사람, 아이디어를 지지한다면 이는 그 제품 등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첫 번째 추천’과 기능적으로 같은 효과를 내는 무언가 때문이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카너먼은 “국민투표 안건이 첫날 지지를 거의 얻지 못한다면 그 안건은 끝내 국민투표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남들이 그를 지지하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판단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초반의 인기는 자기 강화(self-reinforcement)적 속성이 있으므로 신제품이 잘 팔리려면 출시 첫 주에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결국 ‘댓글부대’의 여론조작은 초반에 이루어져야 성공률이 높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을 놓고 논란이 되고 있는 징벌적손해배상제도 ‘잡음’이 개입해 정확한 판단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예. 미국의 법은 다른 사건에서의 징벌적 손해배상액 규모에 대해 배심원들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도록 금한다. 그 결과 같은 잘못을 두고 매우 적은 금액부터 어마어마한 금액에 이르는 손해배상액이 책정될 수 있다. 카너먼은 “이 제도의 ‘잡음’은 기준점이 없고 판단이 임의적인 것”이라 말한다. “법은 배심원들의 정의감이 죄질에 대한 숙고를 통해 정확한 처벌을 도출하는 데로 나아갈 것이라고 상정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난센스다. 사람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사법 제도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스트레스와 피로감은 판단을 흐리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배가 고프면 판사들은 더 엄하게 판결한다. 의사들은 일과가 끝날 무렵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할 가능성이 높다. 시간의 압박을 받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는데도 즉효약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능은 판단력에 영향을 줄까? 카너먼은 “그렇다”고 말한다. 지능이 높을수록 예측력이 높기 때문. “상위 1%의 두뇌가 모인 집단에서도 지능이 상위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은 하위에 속하는 사람보다 박사 학위를 따거나 책을 출판하거나 특허를 따낼 가능성이 두세 배 높다.”
경영 전략 컨설턴트 올리비에 시보니,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와 함께 쓴 책. 응급실 의사, 형량을 선고하는 판사 등 ‘누가 판단하느냐’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사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간다. “잡음을 없애려면 인적 판단을 보완하기 위한 ‘알고리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은 다소 평이하지만 그 결론까지 이르는 여정은 충분히 흥미롭다.
대니얼 카너먼·올리비에 시보니·캐스 선스타인 저/ 장진영 역/ 김영사/ 6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