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동물을 위해,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가축은 노동과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 들짐승은 전부는 아니라 할 지라도 대부분은 양식이나 그 밖의 쓸모를 위해, 즉 가죽이나 기타 도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한 말입니다. 오늘날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명제에만 가장 부합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반려동물일 것입니다. 하지만 반려동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반려동물은 노동, 양식, 가죽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죠.
반려동물은 오로지 사람의 정서적 위안을 위해 존재합니다. 오늘날 반려동물은 종교 다음으로 사람에게 정서적 안정을 주는 존재로 부상했습니다. (박민영 『즐거움의 가치사전』)
실제로 대부분의 미국인들도 반려동물이 되는 필수조건은 효용이 아니라 무용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전에서조차 그렇게 정의합니다.
“반려동물 : 효용보다는 확실히 즐거움을 위해 키우는 가축.”
일부 학자들도 고기나 우유나 가죽 등 그 무엇이라도 즐거움을 주는 가치보다 컸으면 반려동물로 살아남지 못했을거라고 말합니다.
결국 반려동물의 조건은 효용가치가 적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는 莊子(장자)의 ‘無用之用(무용지용)’과 상통합니다. 莊子가 산길을 지나다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나무꾼이 그 옆에 있는데도 베려하지 않았습니다. 莊子가 그 까닭을 물으니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莊子는 말합니다. “이 나무는 좋지 못하기 때문에 그 타고난 수명을 다하게 된다.” ‘無用之物(무용지물)’이란 아무 데도 쓸모없는 물건을 말합니다. 그 무용지물이 때로는 ‘有用之物(유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실상보다 쓸모 있는 것이 되는 것이 바로 ‘無用之用’입니다. 莊子 철학의 주요 부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무꾼에게 쓸모 있어야 有用한 것이고, 숲은 지키는 것은 모두 모두 無用한 것일까요.
문화 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도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이를 지적합니다. “즐거움과 효용성은 반대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많은 양의 유용한 우유를 제공하는 힌두의 암소가 비쩍 마른 암소보다 그 주인에게 기쁨을 덜 주는가. 썰매끄는 개가 빨리 멀리 달릴수록 주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개가 얼마나 좋은 개인지를 자랑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예를 듭니다.
반려동물은 무용하기 때문에 그 위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산을 지키는 ‘굽은 나무’는 그 자체가 유용한 것입니다.